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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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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3, 2024 1월 14일 권능을 가로 막는 편견, 권능으로 전하는 복음
    본문 : 마가복음 6장 1-13절본장은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사역이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장면입니다.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 당하신 사건을 기점으로 제2차 갈릴리 사역이 끝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인해 환호하는 군중들과 그럴수록 더해가는 권세자들의 시기와 대적으로 이어져갑니다. 고향에서의 배척(1-6) 예수님을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미천한 목수의 아들로만 아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보여주신 지혜와 행하신 권능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의 눈초리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인물에 불과하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님을 불신하고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기사와 이적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나사렛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은, 선지자가 그를 알고 있는 고향과 친척, 가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건전한 경쟁심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겸손과 사랑의 시각으로 바꿀 때 서로 존경과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사와 사랑이 결여되고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고 시도하지도 않으셨습니다.열 두 제자의 파송(7-13) 복음전파의 사명은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때에 이미 주어졌습니다. 말씀과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을 양육해 오신 예수님은 이제 그들을 파송하십니다. 서로 도우며 증인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둘씩 짝을 지어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신 후 파송하신 것입니다. 복음전파 사역은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 외에는 지니지 말고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만을 가지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전파해야 할 복음 외에는 신변에 대한 염려를 일체 하지 말 것과 호의를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전도자는 항상 청빈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기 소유를 의지함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사역지에 가서는 합당한 자의 집에 머무를 것과 더 나은 거처를 위해 옮겨 다녀서는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주의시키십니다. 복음을 배척하는 지역에서는 유대인의 관습에서 처럼 단호히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준행할 때 제자들은 회개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놀라운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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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7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2, 2024 1월 13일 믿음의 사람이 맛보는 치유와 새 생명의 은혜
    본문 :  마가복음 5장 21-43절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지경에서 떠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다시 건너 가버나움 가까운 곳에 내리시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은혜를 애타게 구하는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보여 주셨습니다.회당장 야이로의 간구(21-24)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신 줄 알았으며 깊이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주의 발아래 겸손히 엎드려 자기의 소원을 간구했습니다. “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교훈을 줍니다. 첫째, 예수님을 최고의 지위로 높이는 절대 겸손의 모습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치유의 역사가 그 당시 사회적으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야이로의 행동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과 확실한 소망을 가진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구대로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심(25-34)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재산을 들이고 신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서 병고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12년의 세월 동안 병이 낫기는 커녕 도리어 더 중하여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중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나왔습니다. 그녀는 부정한 자는 대중 앞에 나설 수 없다는 사회적, 종교적 장애를 극복하고 담대히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원자이심을 믿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내민 손에 전능자의 능력이 들어와 혈루의 근원을 마르게 하였고 병고침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8:44)란 표현으로서 병의 증상이 없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근원이 곧 말랐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12년 간 여인을 괴롭혔던 병이 그 여인의 믿음대로 그 근원부터 일순간에 치료된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병이 치료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는 그 여인의 은밀한 행동을 사람들은 몰랐으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고침받았을 뿐 아니라 그의 믿음을 예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주님은 평강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과 딸의 죽음(35-36) 저자는 “아직 말씀하실 때”라는 표현으로 딸의 죽어감을 안타까워 하는 야이로에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지체하셨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더 구할 필요없이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열 두 해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줄로 믿었던 그런 믿음을 본받을 것에 대한 촉구가 담겨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고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까?  우리를 향하여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죽은 자를 살리심(37-43)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시고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이들을 특별히 훈련하셔서 당신의 증인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야이로의 집은 이미 초상집 분위기로 소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며 “잔다”는 말씀으로 부활의 소망을 깨우쳐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해 비웃는 무리들은 내보내졌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생명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절망의 늪에 잠긴 영혼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고 소녀가 알아듣는 언어인 아람어로 부르시고 깨우셨습니다. 생명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도록 깨우시는 주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치유의 결과는 즉각적이었으며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사역이 이 일로 인해 방해받길 원치 않으신 까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세상사에 종지부(.)를 찍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종지부에 꼬리를 붙혀 쉼표(,)를 만드십니다. 인간의 절망에 새로운 시작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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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6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1, 2024 1월 12일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
    본문 : 마가복음 5장 1-20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에 오신 예수님은 군대 귀신들린 자를 만나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절망 가운데 있는,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거라사 지방에 오신 예수님(1) 예수께서는 마가복음 4장 35절에서 제자들에게 “저 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 동안 풍랑이 일어났습니다(막4:37-41).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원래 목적하시던 호수 동편 거라사인의 지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이 지방은 로마인들에 의해 10개의 도시가 세워진 ‘데가볼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 뿐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이 함께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자의 모습(2-5)  귀신들린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를 삼고 밤낮으로, 어디서든지 괴성을 지르며 돌로 자해 행위를 일삼아 주위의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었습니다. 발에 고랑을 채우고 손에 사슬을 묶어도 끊어 버립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사는 이의 특징을 말해줍니다. 그의 거처는 죽음 사이입니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으로도 죄성을 제어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을 학대하는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귀신에 사로 잡히는 것은 단순한 질병이나 정신이상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고 파괴하려는 필사적인 사탄의 시도입니다. 귀신에게 명령하심(6-10)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신적인 기원과 초월적인 권능을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크게 소리 지르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괴롭히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빛 앞에서 숨어있던 자신의 존재가 폭로되었고 무서운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군대’였습니다.  ‘군대’는 ‘군단’이라는 뜻으로 보통 1개 군단의 병사가 6000명 가량 됩니다. 이처럼 많은 귀신이 한 삶의 영혼을 파괴하려고 집단 거주하고 행동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칩니다. 다시 예수님은 귀신에게 그 사람에게서 떠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오라고 할때 꼼짝없이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나왔고 돼지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쫓는 권세와 능력을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막3:14-15).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 안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돼지떼의 손실(11-13)  유대인들은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생각했으나 거라사 지역은 이방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상대로 돼지사육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행하는 유대인의 이중적이며 외식적인 삶을 보여 줍니다. 무엇이든 파괴하는 경향이 있는 귀신들은 사람을 파괴할 수 없게 되자 돼지에게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예수님에게 청하였고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셨습니다. 귀신들이 그 사람을 떠나서 돼지떼로 들어가자 돼지떼 전체가 호수에 몰사하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온전하여졌습니다. 도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파괴된 인격, 절망적인 영혼에게 찾아 오셔서 완전한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두 종류의 사람(14-20)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하여 마을에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못해 달려와 확인해보니 전에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여져서 옷을 입고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보다는 경제적 손실에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만일 예수님께서 더 머물러 있으신다면 더 많은 손실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떠나가시기를 종용합니다. 반면에 귀신 들렸던 자는 은혜를 감사하며 봉사의 태도를 보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의 가치가 이천마리 돼지보다 소중하고 가치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시려고 할 때 그는 주님과 함께 가기를 간청하지만 예수님은 “집으로 돌아가…네 친족에게 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그의 삶을 통하여 가정과 사회에 봉사해야 합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 전도와 봉사하는 일에 신속하게 앞서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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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5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0, 2024 1월 11일 창대해지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 토치자의 권능
    본문 : 마가복음 4:30-41풍랑이 이는 바다 위에서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풍랑이 심한 인생길과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항해하시는 주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겨자씨의 비유(30-32) 주님은 작은 겨자씨를 비유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산되어 나아가는지를 말씀하시고, 믿음이 비록 작고 보잘것 없게 시작된다 할지라도 나중에는 위대한 것으로 성숙해 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의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어 그를 온 인류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듯이 나사렛의 예수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33-34) 비유의 목적은 듣는 이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6;16:13).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합니다. 항해를 명하시는 그리스도(35-36)  주님이 명하신 방향은 바다 건너편인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동안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는 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저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편은 우리를 기다리는 선교의 현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제자들은 바다를 항해하면서도 몰랐고, 폭풍 속에서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시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쉼이 있던지 더욱 큰 일이 기다리던지 믿음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풍랑이 일어남(37-38)  갑자기 일어난 돌풍과 심한 파도로 인해 배에 탔던 제자들은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바다에서 자란 어부들이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지식과 경험과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워낙 거센 광풍이라 그들의 힘으로는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채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죽음에 부딪힐 때 사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오직 주께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급하게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풍랑을 잠잠케 하신 그리스도(39-41)  주님은 배가 흔들리고 요동하는 중에도 주무셨으나 제자들이 깨우자 지체없이 일어나서 거센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 꾸짖어 잠잠케 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원의 손길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풍랑이 일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며 약한 믿음은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풍랑이 있을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을 것입니다.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주목하십시오. 인간이 절망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작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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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9, 2024 1월 10일 감춰지지 않는 복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본문 : 누가복음 4;21-29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며 그 결과는 무엇인지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등불의 비유(21-25) 등불은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하여 빛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셔도 자신을 숨길 수 없었던 것 같이 우리도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속한 사회의 한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실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비밀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빛가운데 살며 빛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없고 허물없이 살아야 합니다. 회개 잘하는 사람, 이웃의 마음을 밝혀 주는 사람,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스스로 열매맺는 땅의 비유(26-29) “씨가 나서 자라되”라는 비유는 복음에는 싹을 내고 자라게 하는 생명력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와같이 주의 복음에는 사람의 마음에 뿌려지면 싹을 내고 줄기가 자라 구원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성장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씨앗은 잠재력을 드러냅니다. 작은 한 알 속에 크고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둘째,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내가 요구됩니다. 셋째,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개인의 영적 성장이나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 사역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심판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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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3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8, 2024 1월 09일 백배 열매 맺는 좋은 땅, 좋은 마음
    본문 : 마가복음 4:1-20주님은 비유를 통해서 많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비유들은 일상 생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씨 뿌리는 비유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농부는 그리스도 입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마음 밭의 네 가지 상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길 가(4,15)  길가와 같은 마음은 신앙을 인격적으로 받지 않고 교리와 이론으로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사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당시 유대교적 전통만 고집하고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유대교 지도자를 일컫고 말씀을 배척하는 모든 불신자를 말합니다. 말씀은 듣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돌 밭(5,16)  신앙을 종교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는 자들의 심령 상태를 말합니다. ‘돌밭’의 상태란 숨겨져 있거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나 죄성이 남아있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신앙으로 인하여 핍박이나 환란이 올 때 넘어집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만이 시험이나 환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뽑히지 않은 죄성은 무엇인가요? 가시떨기(7,18)  이들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약1:8). 그러므로 세상의 염려, 물질의 유혹, 세속적인 향락에 육신의 정욕이 이끌려 힘있는 신앙인으로 성장을 못합니다. “기운을 막으므로”라는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영적 성장의 기운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밭(8,20)  누가복음에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눅8:15)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들은 큰 기쁨과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결실, 즉 영적인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환경과 여건에 상관없이 말씀을 구체적인 삶에 적용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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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7, 2024 1월 08일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사람
    본문: 마가복음 3:20-35  열두 제자를 세우신 후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에서의 사역에 박차를 가하셨습니다. 그러나 식사하실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숫자 만큼이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도 강해져 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입니다.오해와 비난(20-22)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사뭇 다르다 못해 반대에 가까운 메세지를 전하셨으며, 종교적 경건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자들 중에서 제자를 선택하는 등 허물 많고 소외된 무리들과 주로 어울리셨을 뿐만 아니라 기이한 능력들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바라보지 않는 무리들의 눈에는 이러한 예수님의 행적이 결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 마저도 예수님을 한 미치광이로 보는 항간의 소문에 동조하여 그의 활동을 자제시키기 위해 찾아나섰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는데 불안함을 느낀 나머지, 예수님의 능력이 사단에게서 말미암는다고 공공연히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고수해 보고자 하였습니다.     설명과 경고(23-30) 소위 지식인들이라 하는 서기관들의 억지 주장에 대해 예수님은 논리적으로 답변하셨습니다. 먼저 자신이 사단과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을 결박하고 사단의 세력을 꺾고 있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 후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엄히 경고하십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말의 의미를 좀더 설명했습니다. 모든 죄가 무조건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해야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부하나님은 구원 계획을 세우셨다면 성자는 구속사업을 이루시고 성령은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부인하고 훼방한다면 어찌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참 가족(31-35) 혈연은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갈등 속에는 부모가 자녀를, 형제가 형제를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예수님이 경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영적 관계를 교훈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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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6, 2024 1일 07일 하나님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제자들
    본문 : 막 3 : 7-12예수께서 점증되는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잠시 갈릴리 호수 어느 지점으로 피하셨던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구하러 오신 분이 심한 배척으로 끝내 몸을 피해야만 하는 모순된 상황은 예수의 죽음으로까지 비화되어 갔습니다. 예수께서 몸을 피하신 것은 사람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뿐아니라 예수님은 여러번 몸을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고난 주간에는 오히려 자원하여 죽음의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거 기사로서 1차 갈릴리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각처에서 군중들이 몰려듬(7-8)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지도계층에서의 적대감이 점점 가중되자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바닷가의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예수님은 많은 무리들 가운데 둘러 쌓이셨습니다. 허다히 몰려든 무리들의 출신지는 예수님이 주로 계시던 가버나움이나 갈릴리 지방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남쪽 지방인 예루살렘과 이두매, 동쪽 지방인 요단강 건너편, 북서쪽 지방인 두로와 시돈 등 팔레스타인 전역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벌써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고치심(9-10) ‘핍근히 함’이란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접촉하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 생각되었는지 맹렬하게 달려들며 밀어대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은 그들과 간격을 두시기 위해 작은 배를 해변 가까이 준비시키시고 그 위에 오르셔야만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향하여 유한한 육신의 문제만을 들고 나와 아우성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지 않으시고 병을 고쳐주심으로 저들의 육신의 필요에도 관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귀신들에게 함구를 명하심(11-12)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고 체험하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으면서도 대적하기를 일삼고 있는 귀신들에게는 장차 멸망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많이 경계’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엄중히 꾸중’하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귀신들의 놀람과 정확한 고백이 결코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본질에 대해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라(요8: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그들에게는 영원한 심판만이 예비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선전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부르셨나(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들 각자의 외적 조건이나 열정 등을 보시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권위와 뜻과 계획에 따라 원하시는 자를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한 예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셨다고만 하였는데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6:12은 산에 오르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름에 대해 제자들은 주저없이 즉각적으로 순응하였습니다.왜 부르셨나(14-15) 열 두 제자가 세워진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고 그와 대화하면서 그에게 배워야 했습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 공생애의 후반부의 대부분을 그의 제자들을 훈련시키는데 할애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훈련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보내심을 받아야’했습니다. 그들은 보냄을 받은 자, 곧 ‘사도’로서 예수님을 대신할 자들인 것입니다. 셋째,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권세는 본래 예수께서 지니신 권능이었으나 이제 제자들에게 부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자신의 사역에 동참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16-19)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신하는 위치인 열 두 사도의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 수준, 인품 등을 보면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열 두 명중 네 명은 어부고 한 명은 사회의 멸시와 비난의 대상인 세리이며 또 한 명은 과격한 열심당원, 나머지 여섯 명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들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장래의 그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따라, 혹은 성품을 따라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그들을 격려하시기도 하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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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00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5, 2024 1월 6일 사람을 우선시하고 선을 행하는 안식일
    본문 : 마가복음 2:23-3:6예수님의 가르침은 권세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제정의 의도와 목적을 시원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23-24) 율법주의자들은 꽤나 까다롭게 율법의 항목들을 규정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들을 상세하게 규정하였습니다. 물론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들 스스로 규정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세의 율법에는 그런 자세한 조항들이 없습니다. 마침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시장끼를 느껴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이 일을 바리새인들이 발견하고 그들의 율법 조항을 근거로 제자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추수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해석(25-28)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잘못이 없다고 변호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판례로써 다윗의 예를 들었습니다.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하던 다윗은 성소에 들어가 대제사장에게 생명의 유지를 위한 떡을 구하였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은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진설병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행동은 정당하였습니다. 죽을 위기에 있는 자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우는 특별한 예외 조항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도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의 목적(3:1-6) 안식일에 대한 자기들의 규정을 근거로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어떻게 행하나 엿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개의치 않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그것은 의술행위였으며 그 역시 안식일에 행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고자 안식일에 대한 진리를 설파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요,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나오도록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하나님이 회당에 오셨고 죽을 가련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목적과 정반대로 바리새인들은 그 가련한 병자를 죽게 내버려 두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은 완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화를 내신 후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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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9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4, 2024 1월 4일 하나님 아들이 권세, 죄 용서와 치유
    본문 : 2장 1-12 문둥병자에 이어 중풍병자의 네 친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네 친구들의 믿음으로 얻은 것은 병을 치료받은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치료는 덤이었고 정작 받은 중요한 선물은 중풍병자의 죄사함이었습니다. 네 친구들의 믿음(1-4) 예수님의 권세와 사람들의 믿음이 만나 반응할 때 놀라운 일이 이루어집니다. 중풍병자의 네 친구는 예수님의 권세를 믿었습니다. 네 친구는 병으로 꼼짝도 못하는 친구를 병상에 메 워서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계신 방에는 너무나 많이 모인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큰 확신이 없었다면 네 친구는 병자를 데리고 도로 가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네 친구는 급기야 지붕을 뜯어내었고 그 구멍으로 친구를 예수님 계신 곳에 내려놓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갑자기 캄캄하던 방안이 환해지며 이상한 물건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던 사람들의 놀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네 친구의 믿음의 동기를 이미 아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5-10) 네 친구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축복은 뜻 밖에도 중풍병자의 죄사함이었습니다. 물론 병도 나았습니다. 하지만 병을 낫는 것은 그저 덤이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사함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중풍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죄가 그를 힘없이 만들었고 돌아눕지도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근본적인 원수인 죄를 없이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의도를 알 턱이 없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을 모독하는 자 정도로 생각하고 속으로 정죄하였습니다.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발언이었습니다. 병든 자더러 일어나 가라고 하면 되겠지만 만일 그렇게 되면 주님의 본래 오신 목적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구주십니다. 걸어 돌아간 환자(11-12) 예수님의 모든 이적은 예수님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으며, 그 사람은 그대로 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하지만 정말 놀랄 일은 예수님에게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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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8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2, 2024 1월 03일 기도로 준비하는 전도와 긍휼 사역
    본문 : 마가복음 1:35-45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보다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저주의 세력들을 몰아내심으로 질병과 귀신에게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은 오직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권세있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와 전도(35-39) 예수님은 바쁜 치유사역 중에서도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시간은 새벽 미명이었습니다. 실상은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친히 새벽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치유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폭이 점점 넓어지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유대 국가가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유대 국가를 해방시킬 정치적인 메시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정치적인 사람들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기셨고, 그곳에서 또 다시 복음을 전파하시며 치유사역을 계속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 사역의 우선순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심(40-45)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확산되자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문둥병자의 믿음이었습니다. 당시 문둥병은 불치병인데다가 종교적으로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의 믿음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당시 관례와 달리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금기사항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몸에 대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에게 가서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부정함에서 해방되라고 친절하게 일러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몸의 질병만을 치유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부정한 죄를 깨끗케 하시는 속죄의 대제사장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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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1, 2024 1월 2일 권세있는 자의 부르심, 권위 있는 새 교훈
    본문 : 막 1:16-34마가는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간략히 언급한 후, 그때까지 예수님이 유대 지방에서 하셨던 활동은 생략하고 바로 갈릴리에서의 초기 사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심(16-18) 두 형제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그들이 어부의 생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들 형제는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소개(요1:29)를 들은 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르시자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의 수단인 그물을 비롯한 과거의 모든 삶을 과감히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허황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닌 ‘~되게 하리라’는 약속과 목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 건설의 위대한 주역의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심(19-20) 이들 형제 역시 어떤 종교적 분위기나 헌신의 순간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생업에 충실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삯군을 고용할 만한 상당한 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적인 배경이나 혈연의 정에 매이지 않고 즉각적인 헌신의 길에 나섰습니다.권세있는 가르치심(21-2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모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내용과 방법에서 전혀 새로웠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기록된 문자에 의존하였습니다. 다 낡은 의문에 기록된 율법 조항들을 거론하였습니다. 고작해야 그들은 율법을 인용하는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그 율법의 의도와 목적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읽어댔을 뿐이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파헤쳤습니다. 그 율법의 목적을 간파하셨습니다. 그 율법이 오늘날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율법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주인이십니다. 귀신을 멸하시는 권세(23-27)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마침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만드신 창조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는 선한 천사들과 타락한 천사들, 곧 귀신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귀신들도 자기를 만드신 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호령하셨습니다. 창조주의 명령에 귀신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쫓겨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들의 주인이시며, 그 모든 영들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들을 악한 영들이 괴롭히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치료의 권세(28-31) 예수님의 권세에 대한 소문은 갈릴리 사방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시몬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의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 일을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저 환자의 손을 잡아 일으켰을 뿐인데 시몬의 장모는 그 즉시로 일어나서 봉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시기에 우리 몸의 변화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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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96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01, 2024 1월 1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본문 : 마가복음 1:1-15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면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마가는 ‘즉시’, ‘곧’, ‘곧 바로’, ‘멀지 않아'로 번역된 한 단어를 사십 회 이상 사용하여 종되신 예수님의 희생의 삶을 신속하게 소개하였습니다. 이런 의도에서 마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지 않고 처음부터 예수님의 복종을 기록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예비(1-8) 하나님은 구세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고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나타나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활약은 메시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께서 가져올 천국 복음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한 증표로서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물세례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곧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그 영혼이 영원한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줄 수 없었습니다. 요한 자신도 죄인이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푸십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9-11)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말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처럼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친히 죄인과 같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자기 한 몸에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례식은 앞으로 인류를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하나의 신고식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처럼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한없는 희생과 겸손을 알리는 것입니다. 시험 받으신 예수님(12-13)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셨으며 그곳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시험을 받지 않으시지만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아담은 시험을 받고 실패하였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그 시험을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에게 구세주의 완전한 자격이 있음을 확증한 순간이었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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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December 30, 2023 12월 31일 현숙한 아내
    본문 : 잠언 31: 10-31 르무엘 왕의 모친은 덕 있는 아내가 주는 성실한 열매가 얼마나 귀한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인은 남편과  자식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귀한 존재임을인식하게 합니다.    남편에게 훌륭한 내조자(10-12) 한 남편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생활을 할 때 내조를 잘하는 여인을 만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관습 중에는 아내를 보석과 바꾸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보석이 비싸고 귀할 지라도 현숙한 아내와는 바꿀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여인에 대하여 22개의 구절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남편에게 신뢰감을 주는 여인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신뢰성이  깨지면 그것이 가정 안팎의 심각한 문제로 파생됩니다. 이 신뢰감이  교감될 때에 남편은 부정된 수입을  의지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게되며 그런 가정은  모든 것에서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런 여인이있는 한 그 가정에는 항상 선한 열매만이 맺히게 되는데 특히 가정이 안정되면 남편이 마을의 중요한 임무를 처리하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모신 가정은 천국과 같습니다.    부지런한 아내(13-24) 부지런한 여인은 항상 기쁜 마음으로 일하되 남에게 일을맡기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라의 부강을 위해 무역을 하듯이  가정을 위해 먼 곳을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물질을 모아  저축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이 여인은 근면하여 남보다 일찍 일어나 하인들에게  일을 맡기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 남은 이익으로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예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모든 쓸  물건들을 손수 준비하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등 최선을 다하는  여인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이 여인에게 더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고  한다면 여인은 열심히 벌어서 움켜쥐기만 하지 않고어려운 이들에게  베푼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내일을  준비하는 섬세한 여인입니다.그리고 자신을 가꿀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인(25-31) 이 여인은  가정이나 물질과 같은 육적인 것 뿐아니라 영적인 것에 있어서도 성숙했습니다.  그는 입술의 말에 지혜가 있어서 이를듣는 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과 남편에게 귀중하게 여김을 받았던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현숙함은 개인적인 교양이나 인격에근거한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연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여인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어느 부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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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December 29, 2023 12월 30일 이성과 술로 소중한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본문 : 잠언 31:1-10 르무엘왕의 모친은 왕이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욕, 술  취함에 조심해야 하며 동시에 빈궁한 자를 돌아보고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 것들(1-7) 르무엘 왕을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한 나라의 왕으로 보는 견해와 솔로몬일 것이라는 견해, 그리고 여디디야(삼하12:25)라고 보는 견해들이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왕의 자질에 대한 교훈을 주려는 어머니의 사랑이 깃들여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이 아들은 기도하여 서원대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교훈은 정욕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들중에서도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이 문제로 인해 책망받은이들도 있습니다. 힘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정사를 잘 돌보라는 것이고가정을 행복하게 하라고 주신 선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로 독주를 멀리하라는 교훈입니다.  술은 정상적인 판단과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그래서 올바른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또한 마음과 생각을 흩어 놓아윤리적으로 타락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술이 유익한 경우는 인생에 다가오는 수많은 역경을 잠시만 잊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받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것조차 올바른  것으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근심과 걱정을 위해 친히 탄식하므로 기도해 주시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에게 영육간에 유익을  주지 못하는 독주를 마시고취하는 행위는 금해야 할 것입니다.    왕이 해야 할 일들(8-9) 왕은 술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말 못하는 벙어리를 위해그의 입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벙어리는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에서  억울한 일이나 곤란한 일을 당할 때 자신을대변하지 못하고 항상 억울하게 당하기만  합니다. 이들을 인정해 주고 억울함을 풀어 주는 자상하고 의로운  왕이 되라는 교훈입니다(잠20:28). 누구든지 자신을 높은위치에 있게 한  것은 자신의 지식이나 힘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합니다. 그분을 두려워하고  직위에 연연하지 말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들 편에서법을 집행하고 도와야 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주님을 따르면서 받은 직분을 명예로 착각하지는 않았는지요? 직책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게 건지신주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이를 간증하고 나누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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