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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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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3, 2024 2월 4일 탐심으로 저버린 은혜, 주인을 대적하는 악행
    본문 : 막 12:1-12 당시 팔레스틴에는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서 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이나 로마인들이 많아서 부재 지주와 소작인 간에 문제들이 빈발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음흉한 저의가 시시각각으로 표출되어가자 예수님은 악한 농부를 비유로 들어 그들을 정면으로 책망하시며 경고하십니다. 포도원과 주인(1) 참으로 주인은 세심하고 사려깊은 노력을 기울여 포도원을 꾸몄습니다. 야생 동물이나 침입자로부터 보다 수월하게 포도원을 지키고 관리할 수 있도록 울타리를 두르고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수확한 포도를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도록 구유 자리도 팠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의 권한을 모두 소작을 준 농부들에게 위임했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연약한 포도나무 같은 민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가나안 땅으로 이끄신 후 그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이들을 돌볼 자로 선지자와 지도자들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농부와 종(2-5) 수확의 때가 되자 주인은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계약을 이행하기는 커녕 도리어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여 주인의 종을 때린 후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놀라운 인내로 다른 종들을 계속 보냈으나 농부들의 패역함은 더 심해져 상처를 입히고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회개의 열매, 믿음의 열매, 순종의 열매 등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세상에 보내진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유대 백성들이 행한 핍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해 살기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의 흑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농부와 아들(6-8) 주인은 최후의 방법으로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공경하리라’ 기대했던 주인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들의 이권을 확보하려는 욕심에 농부들은 아들마저도 죽이고 그 시체는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리는 포악함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심판(9-12) 이제까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내와 관용을 보여주었던 주인이지만 마지막 기회마저 거부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는 말씀대로 행한대로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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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February 01, 2024 2월 2일 주님이 기대하시는 열매, 정결한 교회와 순전한 신앙
    본문 : 막 11: 11-19고난 주간 중 둘째 날(월요일)에 예수님은 메시야의 권위가 드러나는 일련의 교훈들을 주셨습니다. 전통적인 종교관습에 젖어 있던 백성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겼으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구체화 할 만큼 자기들의 권위에 심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12-14) 언뜻 생각하면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를 구하시고는 잎 밖에 없다고 서슴없이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당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님의 배고픔과 이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 무화과나무, 그리고 그 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가 핵심이 아닙니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무화과나무도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외적인 형식만 화려할 뿐 그 내용은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나님의 때도 분별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15-17) 성전내 이방인의 뜰에는 대제사장의 승인을 받은 상인들이 제사에 필요한 짐승들과 물건을 팔아 먼 곳으로부터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순례자들은 이미 제사장에게 제물로 합당하다고 확인받은 짐승을 상인들을 통해 구입하였으며 성전세를 물기위해 이방 화폐를 성소의 세겔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본래의 선한 목적은 상실되고 상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 결탁하여 자신들의 이윤을 보다 많이 남기기 위해 순례자들을 착취하는 갖가지 부정과 부패를 자행하였습니다. 성전이 세상보다도 더 타락해 강도의 굴혈로 변한 현실에 직면하신 예수님은 완력도 불사하시며 성전 정화작업을 수행하셨습니다. 성전을 빌미로 이익 추구에 눈이 멀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과 부패한 성전으로 대변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종교상을 통렬히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전 경내를 감람산으로 가는 지름길로 사용하는 것도 막으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만나주시는, 그리고 당신의 백성이 모든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처소로서 거룩히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두려움(18-19) 성전 정화 작업에 이어 성전의 존재 목적에 대해 선포하므로 무리가 예수님의 교훈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종교 지도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빛이 비취므로 어둠이 두려워 떨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면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히11:38).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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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31, 2024 2월 1일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본문 : 막 11:1-10오늘부터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마지막 일주일인 고난 주간의 일들이 기록됩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주간 첫날(일요일)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입성(1-7)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입성은 곧 당신이 평화의 왕 메시야이심을 알리는 일종의 무언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정복자들처럼 거창하게 군마를 앞세우고 깃발을 휘날리며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더구나 그 나귀마저 빌린 것이었고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의 겉옷을 깔았습니다. 이는 스가랴 9:9의 성취로서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평강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몇 조각의 빵으로 수천 명을 먹이신 주께서 스스로는 배고픔을 감수하신 일이나, 죽은 자를 소생시키셨던 권능의 주께서 스스로는 죽음의 쓴 잔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처럼 만왕의 왕이며 만유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무리들의 반응(8-10) 비록 예수님을 통해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 정도만 바라보고 있긴 했지만 많은 무리들이 분명 왕으로서의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으며 밭에서 벤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폈고 예수님을 앞뒤에서 따르며 ‘호산나’로 환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많은 시간을 갈릴리라는 외딴 지역에서 보내셨고 이적을 베푸실 때에도 그 일을 비밀로 해두도록 당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치 개선 장군이 승리를 거두고서 입성하듯이 의도적으로 무리들의 환호를 받아가며 당당하게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날은 유월절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몰려들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성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이라는 마지막 사단과의 일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에 당도하셨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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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5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30, 2024 1월 31일 간절한 기다림과 외침, 소원을 이루시는 주님
    본문 : 마가복음 10: 46-52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인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공생애 기간을 마무리 하시게 됩니다.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46-47)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시는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신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바디매오에게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소경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부른 호칭은 ‘다윗의 자손 예수’였습니다. 이 호칭은 유대교적 전통에서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당시 바디매오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고 있었음을 볼 때 소경인 바디매오의 영적 안목이 두 눈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심히 소리 질러(48-50) 소경인지라 예수님이 어디쯤 지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사람들의 몰이해와 매정함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 높여 예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결연히 나아가시던 엄숙한 발걸음을 멈추시고 바디매오의 간구를 듣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디매오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께 대한 그의 갈망이 얼마나 간절했는가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벅찬 감격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기뻐하고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줍니다.보기를 원하나이다(51-52) 예수님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단순히 보기를 원하는 희망사항이 아닌 메시야가 오셔서 행하실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입니다(사35:4-6). 자신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다윗의 자손 예수이신 메시야에 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시게 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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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9, 2024 1월 30일 생명 다해 섬기는 종 예수 그리스도
    본문 : 막 10: 32-45문제의 발단을 일으킨 두 인물인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키시는 현장이나 변화 산상의 현장에 동행했을 만큼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배려를 자신들을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에 두셔서 예수님에 버금가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32-34) 십자가를 향하여 결연한 모습으로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불길한 예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두 번째 예고 때보다 더욱 상세하고 정확하게 앞으로 있을 고난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으뜸되길 원하는 두 제자(35-4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하게 될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세 차례의 예고를 들었으면서도 두 제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둘의 관심은 메시야 왕권의 영광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위기를 보니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뭔가 일을 벌이실 것 같다고 판단한 두 사람은 그 전에 베드로를 제치고 제 2인자로서의 자신들의 위상을 견고히 해 놓고자 예수님의 확답을 들으려 한 듯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친이모이기도 한 자신들의 어머니까지 등장시켜 청탁을 넣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 좌, 우편이 어떤 자리인지도 모르면서 그 자리를 탐하는 두 제자의 영적 어리석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메시야 왕국에서의 영화를 얻는 방법은 권좌에 앉는 것에 있지 않고 도리어 고난과 죽음을 통해 권력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잔’과 ‘세례’라는 말로 설명하시고 그 영광을 부여하는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 뿐만 아니라 나머지 열 제자 모두 고난은 간과하고 영광만을 차지하려는 야심에 서로 갈등하고 있습니다.섬기러 오신 예수(42-45)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예루살렘에서의 왕권적 통치, 즉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정치적 집권 쯤으로 생각하고 저마다 큰 권력을 탐하고 있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시기 위해 세상과 현실에 철저히 역행하는 행동 윤리를 제시하십니다. 복종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라면 그 분이 친히 보여주신 섬김과 낮아짐, 타인을 위해 대신 죄의 대가를 치른 사랑과 헌신의 모범을 따라 행해야 하며 이것이 곧 메시야 왕국에서의 통치 질서라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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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3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9, 2024 1월 29일 영생을 얻기 위한 선택, 제자가 되기 위한 포기
    본문 : 막 10: 17-31 어린 아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를 교훈한데 이어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의 모습을 한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재물(17-27) 청년은 예수님께서 열거하는 여러 계명들을 다 지켰노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자기의 소유를 포기하고 자기 자신도 포기하는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 달려나와 무릎을 꿇으며 영생을 구하는 간절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 가운데 돌아섰습니다. 그 만큼 물욕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고 있는 뿌리 깊고 커다란 장애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 물질을 더 신뢰하기 쉬운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설적으로, 설령 부자라 하더라도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면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극빈자라 할지라도 물질에 연연하여 세속적 욕망으로만 가득하다면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먼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예수님의 비유에 놀란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탄식하였듯이 인간의 노력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분을 의뢰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포기할 때의 보상(28-30) 예수님을 위해 혈연관계나 재물을 포기하면, 십자가를 져야하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내세에서의 영생뿐만 아니라 금세에서도 포기한 그것들을 더 풍족하게 보상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31) 앞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우선권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훌륭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기득권과 우선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헌신과 순교정신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나중된 자로 먼저 된 자인 바울이 좋은 모본일 것입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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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2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7, 2024 1월 28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가정,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
    본문 : 마가복음 10:1-16절 가버나움을 떠나 예수님 일행이 당도한 곳은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하는 베레아 지방입니다. 베레아는 세례 요한을 처형한 장본인인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 지역으로 그는 불의한 이혼과 결혼으로 인해 세례 요한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서 결혼과 이혼문제는 첨예한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민한 부분을 질문하여 예수님의 답변에서 율법과 배치되는 점을 책잡아 공격하기 위한 증거를 삼고자 합니다.  결혼과 이혼(1-12) 신명기 24:1-2에서 모세는 “여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될 때에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이혼시키고 재혼할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남자들이 이 구절을 합법적인 구실로 삼아 여자의 작은 실수에도 거리낌 없이 이혼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입니다. 본래 모세가 이 법을 제정한 것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인권이 유린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함이었는데 마치 적극적으로 이혼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왜곡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혼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고 논박하십니다.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제도이며 그 결합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므로 이혼은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혼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곧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비록 합법적 절차를 거쳐 이혼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 아이(13-16)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막으려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러한 조치에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반대되는 심각한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오는 것을 막지 말고 용납하여 받아들이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전적인 신뢰심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년위주의 교회에서, 가정에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촉구하는 명령이기도 합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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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1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6, 2024 1월 27일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죄에 대해서는 단호합시다.
    본문 : 막 9:38-50예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요한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자신들처럼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과연 이러한 자신들의 행동이 타당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를 위하는 자(38-42)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를 드시며 그 사람의 행위를 금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능력을 행한 사람이 금방 예수님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범한 믿음 때문이며, 둘째는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곧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편협하고 인색한 배타주의적 태도는 교회가 지양하여야 함을 교훈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 한 그릇을 주는 작은 봉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 행해질 때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자에게 있을 복을 강조하십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 아무리 연약하고 미미한 자일지라도 그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훼방꾼이 있다면 그 훼방꾼에게 미칠 형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 이상의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범죄에 대한 경고(43-48)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일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철두철미한 수단을 강구하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신체기관 중 가장 민감한 감각기관인 손과 발, 눈을 예로 드셔서 범죄의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만약 범죄의 원인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지옥에 던져지고 만다는 직설적인 표현으로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빼어버리는 철저한 회개와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소금의 사명(49-50) 소금은 맛을 내고 음식을 보존시키며 부패를 막는데 효과가 있습니다. 섬김을 위한 자기 희생, 겸손, 사랑,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김, 절제와 경건 등의 행위는 이 세상의 삶에서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세상에 대하여 소금의 사명이 있으며 소금의 역할을 통해 ‘서로 화목하게 하는 생활’이 궁극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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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5, 2024 1월 26일 양적 무지를 깨우치고겸손과 섬김의 자리로
    본문 : 막 9:30-37 고난의 때가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의 행보에 오르시기 전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가르치는데 주력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은 아직도 이 세상의 일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30-32) 예수님은 복음 전도사역을 잠시 멈추시고 열 두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에 집중하기 원하셨습니다. 가르침의 주제는 바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8장 31절의 첫 번째 예고 때보다 더 구체적으로 인자의 고난과 죽음, 부활이 임박했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조차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이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8:23).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셔야 하는 길에 대해 올바로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의 스승을 지상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왕이 되어 백성을 구원하실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분이 고난받고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첫째가 되는 길(33-37)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정권을 잡으시고 왕위에 오르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었습니다. 그때가 되면 서열 순서대로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들의 서열에 관심을 갖고 논란을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들의 ‘끝’에 서서 ‘섬기는 자’가 뭇 사람들의 ‘첫째’가 된다는 역설적인 진리로 천국의 질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나라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이 말은 첫째가 될 목적으로 끝에 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인간 관계의 표준으로써 ‘섬김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셨습니다. 당시의 문화는 아이들을 미숙하고 유치하여 별 가치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과 자신을 영접하는 것을 동일시 하시며 가장 낮고 천하며 약한 자들이 바로 교회 공동체에서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나 섬김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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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4, 2024 1월 25일 믿음과 기도로 능력을 갖추는 제자
    본문 : 막 9:14-29 변화산 사건이 있었던 이튿날 예수님은 세 제자와 함께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와 아홉 제자들이 둘러서서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하자 서기관들이 저희들을 조롱하고 있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오심(14-16)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제자들을 놓고 서기관들이 비난하며 변론할 때에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을 보고 크게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였습니다. 그들이 놀란 것은 변화에서 나오는 후광때문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기치 못하게, 그러나 가장 적절한 때에 오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궁지에 몰려 있음을 아시고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는 질문으로 서기관들과의 쟁론에 관여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대적하는 무리들 앞에서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위로하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심(17-27) 아이의 아버지는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이를 데려와 고쳐주기를 청했으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를 비롯한 서기관들, 군중들, 그리고 아홉 제자까지 믿음이 부족함을 통분히 여기시면서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십니다. “하실 수 있거든 도와달라”는 아이의 아버지의 간구에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망적인가를 진단하기 보다는 주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의 결핍이 전정한 문제입니다.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28-29)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느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의인의 간구만이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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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8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3, 2024 1월 24일 예수님의 권위를 확증한 변화산 영광
    본문 : 막 9징 1-13절 이사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증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고를 완료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급박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며 미래의 영광은 그들이 당하는 현재의 고통에 뒤이어 나타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제자들의 반응(1-8) 주님은 세 제자를 뽑아 변화산에 올라가 그들 앞에서 변형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외모의 변화가 아니라 다른 신비로운 형태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초자연적이고 눈부신 출현에 제자들은 심히 놀라면서 영광스러운 경험을 오래 끌고자 그 곳에 초막 세 개를 짓는 것이 좋겠다고 베드로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 사건의 참 의미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그에게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예수님의 경계하심(9-10) 그들이 산에서 내려오자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부활할 때까지는 그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그들은 예수님의 변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그 의미를 바르게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당황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희들끼리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활은 믿었으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예기치 못한 선포에 당황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11-13)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고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서기관들의 주장과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즉, 그들이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엘리야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이미 오셔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리라는 서기관들의 주장이 옳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왔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바로 세례 요한인 것입니다. 또 제기된 문제는 왜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죽어야하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이 이미 예고된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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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7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2, 2024 1월 23일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삶
    본문 : 막 8:27-9:1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벳새다 40km 북쪽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근방 마을로 가셨습니다. 그 곳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따서 지역 이름을 붙인 헤롯 빌립의 영토였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7-30)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열 두 제자의 대변인으로 행동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보다 완벽한 형태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간단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마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침묵하라고 명하십니다.예수님의 수난의 예언(31-32)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는 종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심(33-38) 예수님은 베드로의 만류를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몸서리 쳐지는 일이지만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대속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이 참된 제자의 길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적 삶을 유지하려는 자는 자기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원한 멸망에 이르며, 예수님과 복음에 충성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영원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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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6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1, 2024 1월 22일 마음이 둔한 제자들, 두번 안수를 통한 교훈
    본문 : 막 8:14-26당시 사람들은 정상적이 아닌 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미 행하신 표적을 무수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그들의 마음이 맹목과 위선과 완악함으로 예수를 책잡고자 하는데 있음을 보시고 깊은 탄식을 하셨습니다.누룩에 대한 경고(14) 바리새인들의 요구는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형식만을 중시하고 사물의 근본을 잊어버렸고 육체적인 것에 마음이 끌려 정신적인 것을 등한히 하는 습관에 젖었으므로 예수님의 이적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교훈에 주의할 것을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누룩은 악한 교훈과 부패의 상징으로 특히 은밀하고 간악하여 속으로 침투하는 악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두는 종교적 형식주의와 위선과 불신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의 세속주의의 가르침과 바리새인의 불신앙을 경계하신 것입니다.예수님의 책망(15-21)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자 예수님은 그들의 영적 무지를 책망하십니다. 떡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주의 깊게 숙고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굳어져 그 마음이 완악해지면 이미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성함을 기대하시는 예수님께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히 5:12)”이라는 지적처럼 우리들의 영적 미성숙을 일깨워 주십니다. 벳새다 소경(22) 소경을 예수님에게로 데려온 사람들의 신분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확신있는 행동으로 보아 영적으로 귀한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은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믿음에 대한 확신도 없어 자기를 데려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할 때에 잠잠히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간절히 주를 찾는 적극적인 신앙이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치시는 예수님(23-25) 하지만 예수님은 이 소경을 특별한 방법으로 치유하십니다. 손을 붙드심으로 특별한 개인적인 관심을 보여주셨고 평안한 마음으로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그의 믿음을 돕고자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눈을 적시고 안수하심으로 지극한 관심과 사랑으로 치유의 권능과 소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다른 경우처럼 단 한 번에 치유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치유하신 독특한 모습은 자신의 회복을 직접 깨닫게 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시력은 일부분 밖에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반만 눈을 뜬 상태로 살아간다면 진리에 대해서나 세상의 고통의 죄에 대해 제대로 보지 못 할 것이지만 주님은 시력의 완전한 회복에 신중함과 정성스러움을 보이십니다. ‘다시 안수하시매’ 먼 곳의 물체도 식별 할 수 있는 완전한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남의 축복을 받은 후 거룩케 하심의 은혜가 있음을 설명해주는 치유의 사건입니다. 보내시는 예수님(26) 예수님은 이적이 하나님의 복음 전파의 수단임을 분명히 하여 엄한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받은 은혜를 간증해야 할 경우 모든 감격과 기쁨을 절제하며 분별하여 무엇이 예수님께 유익이 될 것인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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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5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20, 2024 1월 21일 제자들의 여전한 불신, 한결같은 주님의 긍휼
    본문 : 막 8:1-13오늘 본문의 이적은 메시야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칠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주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굶주린 영혼에 대한 주님의 연민을 봅니다.이적을 행하게 된 동기(1-3)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심으로 그 소문을 따라 많은 무리가 사흘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 문제는 ‘먹을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흘을 지낸 무리들은 기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문제를 의논하시며 무리들을 향한 긍휼과 동정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한 영적인 양식의 핍절 뿐만 아니라 육체적 필요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사천 명을 먹이심(4-8)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부정적인 상황을 보고하고 무기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일에 대한 교훈을 망각하고 결국 제자들은 환경적인 상황과 물질적인 상황의 문제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도우시고자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을 살펴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적을 보이시기 전에 먼저 앉기를 명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질서 가운데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권능에 찬 주의 손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음식물을 제자들은 무리 앞에 차려 놓았습니다. 받은 바를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무리들 앞에 내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적은 드린 분량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요구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한 은혜는 넉넉했습니다. 필요한 양 만큼만 제공되었던 구약의 만나와는 달리 예수님이 주신 음식은 모두 먹고도 남을 만큼 풍성하여 장차 베풀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풍성한 잔치를 바라보게 합니다. 무리를 흩어 보내심(9-10) 주님은 은혜를 받고 이적과 기사를 체험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 그냥 머물게 하지 않고 흩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받고 훈련된 열 두 제자들을 복음을 위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교회안에서 은혜 받은 자들이 세상을 향해 흩어져야 할 사명을 주십니다. 이렇게 모이는 것과 흩어지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하나님의 뜻은 원만하게 이루어집니다.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11-13)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논쟁의 장으로 끌어 들이고자 유도해 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기적이나 예수께서 행하셨던 기적 이상의 그 무엇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증명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불신케 함으로써 자기들의 유전을 떠나 예수님께 집중되는 백성들을 흩으려고 모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반응은 깊이 탄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실망과 분노를 대변합니다. 이어서 그들의 불신앙을 향해 심판적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과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봉사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단호한 말로 거절하셨습니다.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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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14
    아름다운동산교회January 19, 2024 1월 20일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믿음
    본문 : 막 7장 24-37 절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불결하다고 여겨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정결 예법을 파기하고 이방인에 대한 신앙적 편견까지 허무셨습니다. 인간이 만든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이것은 말씀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두로 지경으로 가심(24) 예수님은 두로에 있는 한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제자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셨지만 이미 그 곳까지도 예수의 소문이 가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진리와 빛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심(25-28)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 헤롯의 악의를 피하여 게네사렛을 떠나 이방인들의 지경인 두로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딸의 치유를 소망하며 담대히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합니다. 여인은 민족적 반감이나 개인의 자존심을 모두 버리고 거듭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개’와 같이 취급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유대인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여인은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개’라는 표현의 인격적 모멸감도 개의치 않고 은혜를 간구하는 여인의 겸손은 유대인의 오만한 우월의식과 비교되어 이방여인의 믿음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응답하심(29-30) 여인의 겸손하고도 끈기있는 간구로 예수님은 그녀의 내면에 깃든 독특한 믿음을 간파하십니다.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완전히 고쳐주셨음을 믿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마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집으로 돌아와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하시는 예수님(31) 시돈은 두로에서 북쪽으로 약 20-30마일 되는 거리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은거하신 이유는 자신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자들을 피하시기 위함이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귀먹고 어눌한 자(32-35) 사람들이 예수 앞에 데리고 온 사람은 귀먹은 사람이었고 그로 인하여 말을 제대로 못하는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듣는 대로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원리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피해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군중들의 흥분된 분위기를 피해 환자의 마음이 예수께 집중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치유 의지보다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온 피동적인 인격에게 예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마저 동참하기 원하시는 탄식의 간구로 자신의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십니다. 그의 가지신 바 모든 것을 쏟아 넣으시는 간절한 의지로 ‘에바다’라고 하셨을 때 이 명령은 환자의 심령뿐 아니라 닫혀진 귀와 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원한다면 귀먹고 어눌했던 사람처럼 주님과 따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퍼지는 예수의 소문(36-37)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신 이적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십니다. 단지 이적을 행하는 자로 잘못 소문이 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오히려 더욱 예수님을 전파시켰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놀람과 칭송은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활동의 표시가 되면서 이방인 거주지까지 주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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