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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설교
  Count: 1941 11/01/13
제 18강 09/09/07 아브라함의 실수(창 12:10-20)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습니다. 지나온 인생길을 되돌아보면 떳떳하게 자랑하고 싶은 아름다운 일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지우개가 있으면 당장 지워버리고 싶은 어두운 일도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믿고 순종했습니다. 75세의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450마일이나 되는 먼길을 걸어서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이 아브람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땅은 척박했고, 거민들이 텃세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제단을 쌓을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아브람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순종의 사람이었으며,신실한 예배자였습니다.

  그런 아브람이 오늘 본문에서는 너무나 실망스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정도입니다. 비굴해 보일정도로 연약하고, 수취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신앙의사람 노아가 술에취해 하체를 드러내고 실수했습니다.마는, 아브람은 노아의 실수와 비교가 되지않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옛말에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 고 했습니다. 한 번 정도의 실수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크게 탓하거나 나무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 자신의 부족을 깨닫기도 하고, 실수를 통해 인격이 성숙해 지기도 합니다. 또 그 실수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귀한 교훈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1.신앙에는 넘어서는 안 될 국경이 있습니다.

  5번 프리웨이 South를 타고 샌디애고로 가다가, 자칫하면 그만 멕시코 국경을 통과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넘어서는 안 될 국경선이 있습니다. 절을 찾아 관광하는 것은 좋지만, 부처에게 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직장식구들과 함께 회식자리에 참석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여자나 붙잡고 부루스를 쳐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위대한 신앙인 다윗도 한 때 신앙의 국경을 넘은 적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찾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적국인 불레셋 가드로 피신을 합니다. 그런데 그만 가드의 아기스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저사람이 그 옛날 우리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아닌가? 그래서 그만 다윗의 신분이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신분이 노출된 다윗은 두려웠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침을 질질 흘리고 손가락으로 대문짝을 긋습니다. 그리고는 도망을 쳐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람이 넘어서는 안될 신앙의 국경을 넘습니다. 본문 10절에“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가나안이 어떤 곳입니까? “내가 이 땅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 땅에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 축복의 땅입니다. 

  아브람은 잠시 찾아 온 기근, 그 기근 때문에 굶어죽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비를 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오곡백화를 무르익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나일강과 애굽 평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땅인 가나안을 떠나고 맙니다.

  로마서 8:6절에 보시면“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 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육으로만 생각합니다. 

아브람이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땅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40년 긴세월 허허벌판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신발이 부틀지 않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동원하시던,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시던, 굶어죽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본문 10절에 보면,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러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우거란 말이 기근을 피해 잠시 동안 머물기 위해 간 것이냐? 아니면 가나안을 완전히 등지고 애굽에 영구히 살려고 갔던 것일까?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근을 피해 잠시동안 애굽에 내려갔다고 봅니다.

  신앙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한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잠간만 다녀오겠다는 것입니다. 기근이 지나갈 때까지 잠간 애굽에 피했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하나님 잠깐입니다. 내 비즈니스 오픈할 때까지만요. 내아이 대학 들어갈 때까지 만요, 내 딸 시집만 보내놓고요, 집한 채 마련할 때까지만요. 모두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의 국경을 넘습니다. 그러다가 영영 교회를 떠나 신앙의 길, 구원의길에서 실족해버립니다.이것이 바로 사단이주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요, 신앙인입니다. 주어진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신앙의 국경을 넘지 말고, 약속의 말씀위에 바로서서 에벤에셀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신앙의 국경선을 넘으면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람의 마음에 근심이 생겼습니다. 어쩐지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브람이 어떤 문제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까? 우리다같이 본문 11절을 보십시다.“그가 애굽에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내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아브람은 자기아내 사래가 너무 아름답고 예쁘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고, 자기는 죽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75세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4,5년 지났다고 보면, 당시 아브람의 나이는 80세 정도였고, 아내인 사래의 나이는 열 살 적으니까 70세정도 였을 것입니다. 그 나이에 그런 걱정할 정도였다면 사래는 정말 예뻤던 것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쁜 마누라와 함께 사는 남편들은 늘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저도 뭐 약간은 그렇지만, 그래서 아브람이 이런 잔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원컨대 그대는 나의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아내를 누이로 속이자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가 예쁘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결국 바로왕은 양과 소와 나귀와 여종들을 주면서 사래를 아내로 삼습니다. 아브람은 염려하던 그대로 사랑하는 아내를 뺏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약속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지 않으니까,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시잠간의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넘어서는 안될 신앙의 국경을 넘게 되면 아브람처럼 낭패볼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단 한 번의 실수가 훗날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생애 최대의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친히 그 사건 속에 개입하셔서 위기에 처한 아브람을 구원해 주시는 신실하신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애굽의 바로 왕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브람이 사래를 자기 누이라고 하니까, 자기첩으로 취한 것뿐입니다. 전적 아브람의 잘못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왕과 그집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본문 17절에“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이 어떤 재앙을 내리셨는지는 정확히 알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그날 밤 하나님께서 바로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혼을 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깜짝 놀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많은 재물을 주면서 보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다 빼앗긴 아내를 도로 찾았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극적인 간섭으로 아내를 찾기는 찾았습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참하게 수모를 당했습니다.“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9절에도“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사라를 첩으로 취했던 바로가 하나님으로부터 혼쭐이 난 뒤에, 아브람을 책망합니다.“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람이 왜 이런 책망을 들어야 합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입니까? 

  신앙의 국경을 넘어 불레셋으로 갔던 다윗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당했습니까? 장차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요, 예수님의 조상이 될 다윗이 이방인들 앞에서 침을 흘리고 미친 사람 행사를 하면서, 왜 그런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까?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거짓말하다가 불신자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예수쟁이가 더 지독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을 가로 막습니다. 믿는 사람이 왜 저모양이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브람이 신앙의 국경을 넘어, 자기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인것은 4천년 전입니다. 아브람의 이 한번의 실수가 두고두고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이 바로 왕으로부터 많은 재물과 함께 얻어온 여종이 하갈입니다. 나중에 아브람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아브람은 사라와 하갈, 두 여자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하게 됩니다.

  지금 중동의 아랍인들 거의 대부분이 아브람의 실수로 인해 낳은 이스마엘 자손들입니다. 그들은 수천 년이 지금도 이삭의 자손들인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죽기살기로 싸우는 것입니까? “누가 아브람의 적자냐? 누가 하나님의 복을 받을 후손인가?”그 문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비즈니스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아브람처럼 넘어서는 안될 신앙의 국경선을 넘어가지는 않으십니까? 인간적인 방법, 세상적인 방법으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자기자녀로 삼으신 이상, 우리의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정말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면, 내가 처한 상황, 내가 당면한 문제의 한 중심에 찾아오셔서 개입하시고 해결해주십니다.

  우리모두 그 어떤 경우에도 신앙의 국경을 넘지 말고, 끝까지 말씀을 붙잡고 인내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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